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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16 이순신장군과 명량해전 일본기록 그리고 해외반응

이순신장군과 명량해전 일본기록 그리고 해외반응

이순신장군과 명량해전 일본기록

명량해전 일본기록 평가 찾아봤는데 열받네요 진짜


일본어 전공이다 보니 문득 궁금해져서 일본 위키피디아 찾아봤는데 열받네요

뭐 주관적인 곳이니까 그려려니 하고 넘어갈래도 열받는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일본어 직역한거니 좀 어색한 부분 있긴 한대 귀엽게 봐주세요ㅋㅋㅋ






조선수군 중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 수군의 선봉을 치는 데 성공했으나 일본 수군본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본인과 13척전후의 주력함의 보전대책을 취해 전라북도까지 철수했기 때문에 

지역의 제해권을 잃어 조선 수군은 비주력함과 근거지를 잃었다.

조선 수군의 재진출은 일본의 육군과 수군의 철수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명량해전은 전략적으로는 이 시점의 조선측의 패배가 된다.


현대 한국에서는 이 전투를 명량대첩으로 부르는 등 일본에 대승한 해전으로 인식,

선전하고 있고 일본 수군의 참가병력이 군선 133척 운송선 200척  이 중 손실이 

침몰 31척 대파 92척 팔구천명이 전사 하는 등의 역사,자료를 감안하지 않은채 즉 학술적인 방면을 

무시하고 전쟁 결과를 과장하는 주장이 많다. 


어느 척의 입장에도 서지 않고 사료를 학술적으로 고찰할 경우, 실제로는 船手衆로써 좌군에 더한 일본 수군의 병력은 7200명이고 여기에 약간의 다른 가문의 수군을 더하더라도 8000명에는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명량해전에 있어서 대형 배도 사용되지 않고 중형 배인 세키부네를 선발해 운용한 취지가 高山公実録에 


기술 되있는 대로 라면, 상기의 현대의 한국이 선전하는 숫자에는 무리가 있음이 명백하다. 또한 이순신 자신이 저술한 난중일기에는 적선 삼십척 당파(쳐서 부숨)라고 되있을 뿐 격침 확인의 서술도 없고 또한, 함선에 대해 손실을 입혔다는 서술도 없고 대전한 적선의 크기도 적군의 전사자수도 기록되있지 않다. 이순신 장군의 서술을 신용하고 그 밖의 사료를 합해본다면 조선수군은 12~14척으로 일본측 수군의 선봉의 중형 함선 30척을 공격한 후 전장이탈, 해역의 제해권을 방기하고 추격당할 우려가 없는 곳까지 철퇴(퇴각)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이 해전은 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국민에게 널리 알려져있지만 서진(서해안 진출)하려고 한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저지하였다 라고 강조되어 있고 전투의 내용과 전투 후의 이순신이 북쪽으로 퇴각했기 때문에 일본 수군은 서해안에 진출해 전략목적을 달성했다 즉 제해권의 방기와 군대의 이탈도주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하였다라는 사실은 무시되어 일반적으로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아래 이미지는 어느 외국작가가 이순신 장군이 어떤 장군인지를 소개한 이미지입니다. 

아마 명량해전을 묘사한 이미지인 것으로 보이는데, 

수많은 왜군들이 쳐 들어오는 것을 이순신 장군 혼자서 막고 있습니다. 

결과는 왜군들을 모두 섬멸하고, 당당히 뒤돌아서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으로

전쟁의 모든 결과를 말해 주는 듯 합니다.


명량해전에 대한 일본기록 그리고 해외반응 많은 차이가 있는것 같습니다.

아~~ 열받군요.. 그럼 명랑해전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보통 전쟁사의 승전기록을 보면 과장된 기록들이 많습니다.

승자들은 자신의 전공을 크게 부각시켜 공적을 빛내려는 욕심이 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한 전쟁에서 이긴 승자의 마음을 헤아리면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공적보다 축소하여 기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명량해전의 전공을 살펴보면 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던 전쟁인가를 의심할 정도인데,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전공을 세우신 이순신장군과 명량해전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산도 대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왜군들은

이순신 장군과 전면전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기만술을 부렸습니다.

이중간첩을 통해 부산포를 총공격한다고 조선조정에 거짓정보를 흘렸습니다.

선조는 왜군이 흘린 거짓정보를 확실히 믿었고,

이순신 장군에게 부산포로 이동해, 원균과 연합하여 왜군을 막으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왜장의 기만술임을 간파하였습니다.


자신의 부대인 전라좌수영이 부산포로 이동하는 순간,

왜군들은 군량미 확보를 위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급습할 것이었습니다.

결국 전라도가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왜군의 지상군은 안전한 군량을 확보하게 됩니다.

적의 모든 전략과 전술을 꿰뚫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몇차례 장계를 올려 왜적의 기만술임을 설명하였지만,

선조는 끝내 듣지 아니하고 권율을 통해 계속 출전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러 고심끝에 조선의 장래를 위해 어명을 받들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삭탈관직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히자,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의 모든 수군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왜군의 기만술에 안이하게 대처하던 원균은

칠천량에서 조선수군들을 모아 부산포로 진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칠천량에 여장을 푼 원균은 전시에 기생들을 부르고 연회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왜군들이 원균의 사람됨을 알았던 것이었을까요!

왜군들은 칠천량에서 방심하고 있던 조선수군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갑자기 쳐들어온 왜군의 기습공격에 원균은 크게 당황하였고,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조선수군들은 거의 전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각 군영에 있던 많은 장군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원균도 도망가다가 왜군에게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칠천량해전의 대패로 선조와 조선조정은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조선수군을 수습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칠천량해전의 손실은 실로 막대하였는데,

500여척에 달하던 조선수군의 함선은 다 격침 및 침몰되었습니다.

단 12척만 겨우 생존해 보존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거북선은 하나도 없고 모두 판옥선만 있었습니다.

조선조정도 더 이상 수군은 재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순신 장군에게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지상군을 도우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그 유명한 명언을 남기고 임지로 향하였습니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사오니, 죽기로 싸우면 못 이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군들은 칠천량전투의 승리로 의기양양하였으며,

다시 군대를 모아 경상도와 전라도를 동시에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날

1597년 9월 15일 왜군의 연합함대 약 330여척은

부산과 전라도 앞바다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12척의 배를 이끌고

세계 전쟁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불리는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지금까지 명량해전 일본기록과 해외속인식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정말 임진왜란에 대한 교훈을 다시한번 인식해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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