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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28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2. 2015.05.16 서애 류성룡과 징비록 이야기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오늘 건축학에서 처마 얘기를 듣고 무릎을 탁 칩니다.아튼.. 귿~역시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당분간 금요일저녁에 행복하겠네요~^^징비록 읽어볼려구해요. 좋은 방송 감사힙니다~ 역시 넘 재밌음!

건축가님 이번편에서 대박느낌~너무 많은걸 배웠어요추녀이야기 짱! 건축학 교수가 들어오니까 잡학이 더 풍성하네요.

류시민 작가는 역시 명불서전이시구요. 우와 징비록부터 한옥처마에..하회탈 3인칭까지...대애박~~진짜 시간가는줄 모르고 봤다는....ㅎㅎ 과연 자한당과 바른당 국민당에 유시민 만한 학식과 통찰력 겸양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아니다...저만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진사람이 저런당 들에 가는게 애초에 불가능하겠지...




매번 놀랄뿐... 유익한 프로예요..나는 특히 미술과 건축에 관심이 잇는데...오늘 과학적 건축물 이야기 좋아요~!!이런 프로그램 고맙습니다~!!.. 즐겁게 보고나면.  내 맘속에 유익함이 한겹 또 쌓여 . 속이 든든해지는 유익한 프로 . 감사합니다 시즌2도 재밌네. 금욜이 즐거워^^


건축 얘기 넘 좋았어요~~역사와 상식을 알쓸신잡으로 배움.ㅋㅋ다섯 분 다 각 분야의 고수들로재밌습니다. 황희와 기대승 얘기도 감동.작금의 대학들은 취준생들뿐이고 스승은 없고 직업인 교수만 가득한데.ㅠ..황희 같은 학자가 그리움.황교익님의 느긋함도 좋아요.


이번 시즌은 건축이 짱 먹을듯^^ 와~~~진정 시간 가는줄 모르고 시청했어요늦은시간었지만 9살 아이도 함께 너무 유익하게 보았습니다 징비록 이야기 멋지더라~유시민 비주얼은 진짜 반할 인물이 아닌데 이야기 하나는 찰지게 명료하게 잘함.



글구 건축학은 역시 어느분야와도 다 접목이 되어 그런가 건축가들이 좀 예술적기질 잡학다식한 면이 많음.유시민님의 역사얘기듣다보면 시간가는줄모르고 빠져들어요...재밌고 아~그렇구나~~하게된다는....화이팅입니다~^^ 다시 돌아온 알쓸 너무 반가웠어요!!!!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재밌고 유익한 시간이었다.새로 오신 분들도 굿!!!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워주네요ㅎㅎ

알고 보면 감동이 2배일듯 건축가님 감사해요 알쓸신잡2첫방송 역시나~입니다.유작가님의 알기쉬운 사단칠정말씀에 감탄했구요~뉴페이스  또다른 유교수님과 장박사?님의 지식보따리 계속 듣고싶어요.

서애 류성룡과 징비록 이야기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서애 류성룡과 징비록 이야기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조선은 망했을 것이고,

한반도는 일찍이 일본의 속국이 되어 지금까지도 일본어를 쓰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 장군은 우리 민족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조정대신들은 국난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 못지않게 큰 역활을 한 재상이 있었는데,

이번 칼럼에서는 국난중에 나라를 슬기롭게 이끈 [서애 류성룡]과

그의 저서인 [징비록]에 대하여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542년 예조참의 류중영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류성룡은

4살때 글을 깨우칠 정도로 천재 소년이었습니다.

어릴때부터 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류성룡은 1562년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갔습니다.

류성룡을 본 퇴계는 하늘이 내려준 인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유심히 살폈습니다.

퇴계는 자신의 제자들을 칭찬하는데 매우 인색하였는데,

류성룡 만큼은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평하면서 늘 칭찬하였습니다.


퇴계의 인품과 학식을 온전히 익힌 류성룡은

23세에 소과시험인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년 뒤 25세에 대과시험에서 급제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평균연령이 30대 초중반 인것을 감안하면

류성룡은 매우 빨리 출세길에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세에는 행정직의 요직이었던 공조좌랑에 파격승진하여,

조정을 이끌 새로운 선두주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1580년에 부제학을 거쳐 1593년 영의정에 오르므로

신하로서 출세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서애 류성룡의 초상화)

 

 

 

류성룡이 51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자리인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있던 류성룡은

곧 영의정에 올라 조정과 전쟁을 진두지휘 하였습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종료 직전까지 영의정 자리를 지키며 국난극복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으로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류성룡도 영의정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로 낙향한 류성룡은 임진왜란때의 전란을 글로 남길것을 결심하고 집필하였는데,

그 글이 바로 [징비록]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역사적 사실들은 [징비록]에 기록된 내용들이 많습니다.

[징비]라는 제목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즉 류성룡은 [징비록]을 집필하여 임진왜란의 전란을 상세히 기록하므로

후에 있을지도 모를 국난에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징비록 - 국보 132호)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명장 중에 명장이라 할 지라도

장군을 등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무과에 늦게 급제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등용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한미한 가문출신 이었기에 이순신 장군을 후원해 줄 중앙 정치가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순신 장군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서애 류성룡입니다.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 뿐 아니라 권율 장군도 추천하였는데,

결국 이 두 장군이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애 류성룡에 대하여 이순신 장군을 천거한 문신정도로 알고 있으며,

임진왜란에 어떠한 공을 세웠는지 아시는 분들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나 서애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 못지않게 큰 공을 세운 분이셨습니다.

외교를 통해 명나라를 참전시키고, 명나라의 군수물자를 제공하였으며 

각 도에서 일어난 의병활동도 류성룡의 정책에 의해 활발히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요동으로 망명하려는 선조를 끝까지 설득하여 조선에 남겨 항전토록 하였습니다.

이 뿐 아니라 민생법안에서도 획기적인 법안들을 많이 내어 놓았는데

2편에서 서애 류성룡이 어떻게 임진왜란을 극복해 나가는지

그의 저서인 [징비록]의 기록들과 더불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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